없는 주소 — 45화. 거절
《없는 주소》 — 연재 45화
회관 안은 삼십 년 전 마을 회의가 방금 끝난 방 같았다.
긴 마루, 벽의 새마을 달력, 접힌 병풍. 외증조모는 안쪽 벽장에서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개켜진 보자기 안에 두꺼운 책이 들어 있었다. 장부 같은 것. 삼베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게 그 짐이야."
나는 받아 들었다. 묵직했다. 그리고 이상했다. 물속 마을의 물건인데 종이가 바스락거리게 말라 있었다.
"마을 명부야." 외증조모가 말했다. "호적 같은 거지. 이 동네 서른아홉 집, 나고 죽고 시집오고 장가간 거, 대대로 다 적혀 있어. 회관에서 내가 지켰어. 물이 들어와도 이건 안 젖더라. 종이가 지 할 일을 아는 게지."
우리는 회관을 나왔다. 나는 명부를 뒷좌석에 모시고 — 싣는다는 말이 안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 운전석에 앉았다. 외증조모는 타지 않았다. 열린 뒷문 앞에, 마당에 선 채였다.
"할머니. 타세요. 시간이…"
두 시 십 분이었다. 세 시까지 오십 분.
"기사 양반." 외증조모는 또 기사를 불렀다. 중요한 말은 기사한테 하는 분이었다. "나는 못 나간다."
물속 마을 전체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무슨…" 나는 운전석에서 몸을 돌렸다. "모시러 왔어요. 삼십 년 기다리셨잖아요. 배가 이제 왔잖아요."
"기다렸지. 근데 뭘 기다렸는지 아나." 외증조모는 마을 쪽을 돌아봤다. 불 꺼진 지붕들을. "나갈 배를 기다린 게 아니야. 부칠 짐이 있는데 부칠 편이 없어서 기다린 거야."
"할머니가 나가시면 되잖아요. 직접."
"내가 나가면 여기가 없어져." 외증조모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삼십 년 생각한 사람의 결론은 그렇게 평평했다. "이 마을이 물속에서 이만큼이라도 마을인 건, 안에 사람이 하나 있어서야. 집이라는 건 사람이 있어야 집이야. 하나라도. 내가 나가는 순간 여긴 그냥 물에 잠긴 돌무더기가 돼. 그럼 다녀갈 데가 없어져. 마루가 없어지고, 대문이 없어지고. 느이들이 취한 밤에 찾아올 주소가 아예 없어지는 거야."
"그래도—"
"도윤아."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기사가 아니라.
"삼십 년 전에 나는 자리가 모자라서 남은 게 아니야. 그건 반만 맞아. 배에서 느이 외할미 손을 잡았을 때, 알았어. 아, 누구 하나는 남아서 이 마을을 봐야겠구나. 서른아홉 집이 하루아침에 없던 게 되는 걸, 누구 하나는 안 없던 걸로 지키고 있어야겠구나. 그래서 손을 놨어. 미는 김에 눌러앉은 거지."
외증조모는 뒷좌석의 명부를 가리켰다.
"내가 부탁할 건 하나야. 저걸 물 밖으로 가져가라. 그리고 저기 적힌 이름들을, 물 밖에서 불러다오. 소리 내서. 한 번씩이면 돼."
"이름을… 부르라고요?"
"이름은 부르라고 짓는 거야. 삼십 년 동안 이 마을 이름들은 물 밖에서 불린 적이 없어. 무덤이 없으니 제사도 못 얻어먹고, 명부가 잠겼으니 족보에서도 끊기고. 잊히는 게 두 번 죽는 거야. 첫 번째 죽음은 내가 어쩔 수 없었지만, 두 번째 죽음은…" 외증조모는 나를 봤다. "느이가 막을 수 있어. 산 사람 입이면 돼."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오래 있었다. 이 마당에서 나는 두 번째로 셈이 불가능한 지점에 와 있었다. 데려가는 게 효도인지, 두고 가는 게 효도인지. 완주가 뭔지. 이 운행의 목적지가 어딘지.
"할머니. 저 이 운행 완료 못 하면 안 돼요. 미완료가 뭘 만드는지 저희 집이 알아요. 부모님이…"
"완료야, 이건."
외증조모가 잘랐다.
"운행이라는 게 뭐냐. 손님이 가자는 데까지 모셔다드리는 거 아니냐. 내가 가자는 데는 물 밖이 아니야. 저 명부가 가자는 데가 물 밖이지. 오늘 밤 손님은 내가 아니라 저거야." 외증조모는 명부를 향해 턱짓했다. "나는 배웅 나온 사람이고."
궤변 같았고, 궤변이 아니었다. 나는 배차 화면을 떠올렸다. 픽업: 적동로 19-4. 승객: 1명. 목적지: 미정. 승객이 누구라고는 어디에도 안 적혀 있었다. 목적지도 처음부터 미정이었다. 미정인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 칸은 손님이 채우는 칸이니까.
뒷좌석의 명부. 서른아홉 집의 이름들. 1명이 아니라, 어쩌면 백구십 명. 아니, 저쪽 셈으로는 한 덩어리, 1건.
"…목적지를 불러주세요, 손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외증조모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는데 아는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웃던 입가였다.
— 46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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