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11화. 박씨의 리스트
《없는 주소》 — 연재 11화
새벽 세 시의 쉼터에서 박씨를 찾았다. 박씨는 난로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나는 커피 두 잔을 뽑아서 한 잔을 옆에 놓고 앉았다. 지난번의 답례였다.
"여쭤볼 게 있어요."
박씨는 면을 건져 먹으며 기다렸다.
"그 콜이 왜 저한테 오는지 모르겠어요."
젓가락이 멈췄다. 박씨는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라면 용기를 내려놓고, 나를 봤다.
"모르겠다는 놈이 그 눈을 하고 있어?"
"…짚이는 게 있긴 해요. 근데 아니었으면 좋겠어서, 맞는지 알아야겠어요."
"말해봐."
"저희 어머니 고향이 그 동네 같아요. 수몰된 동네. 외할머니 성함을 아는 손님도 만났고요. 손님들도 다 그 동네 자손 같아요. 그러니까 이 콜은…" 나는 단어를 골랐다. "혈연을 찾아오는 것 같아요."
박씨는 오래 말이 없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이윽고 박씨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은행에서 주는 얇은 수첩이었다. 모서리가 다 해져 있었다. 박씨는 수첩을 몇 장 넘기더니, 한 장을 잡고 나를 봤다.
"이십 년 치야."
그리고 그 장을 찢어서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연필 글씨가 눌러 적혀 있었다. 번호도 제목도 없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지워지고 다시 적힌 자국들 위에, 살아남은 문장들이 이랬다.
새벽 4시 전에 끝낼 것. 4시 넘으면 그날은 접을 것.
도착 전에는 어떤 부탁도 들어주지 말 것. 물, 창문, 음악, 전화. 전부.
창문 열어달래도 열지 말 것. 냄새 얘기를 해도.
백미러에 뭐가 보여도 세우지 말 것. 보이는 건 타는 게 아님.
요금은 받지 말 것. 받으면 계약이 됨.
현금은 특히. 거스름돈을 사양하면
거기서 문장이 끊겼다. 그리고 그 아래, 종이 끝이 가로로 찢겨 나가 있었다. 원래 한두 줄이 더 있던 자리였다. 찢은 단면이 낡아 있었다. 어제오늘 찢은 게 아니라, 오래전에 찢긴 채로 이십 년을 접혀 있던 종이였다.
"마지막에 뭐가 있었어요?"
"그건 몰라도 돼."
"박씨 아저씨."
"몰라도 된다니까." 박씨는 라면 국물을 마저 마셨다. "그건 너한테 해당 안 되는 항목이야. 해당 안 되게 만들 거고."
나는 종이를 다시 읽었다. 다섯 번째 줄에서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요금을 받으면 계약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그쪽 일에 값을 받으면, 그쪽 기사가 되는 거야."
"…저 지난주에 현금 받았어요. 어르신 손님한테. 거스름돈 사백 원을 사양하셨고요."
박씨가 처음으로 욕을 했다. 길지 않았다. 한 단어였고, 나를 향한 게 아니라 천장을 향한 거였다. 박씨는 이마를 한 번 쓸고 말했다.
"앱 결제는 회사가 지우니까 없던 일이 돼. 근데 현금은 지울 서버가 없어. 네 손에서 그쪽 돈이 이미 돌았다는 거야." 박씨는 내 얼굴을 보더니 톤을 낮췄다. "겁주려는 게 아니야. 계약이 됐다고 바로 뭐가 되는 건 아니야. 나도 받은 적 있어. 다만 이제 너는 그 콜을 안 받을 수가 없게 될 거야. 콜이 너를 단골로 잡은 거지."
단골. 그 단어가 이상하게 제일 무서웠다. 괴담의 언어가 아니라 장사의 언어라서.
"아저씨는 어디까지 가보셨어요."
박씨는 난로 불을 봤다. 반 박자가 아니라 세 박자쯤 늦게 대답이 왔다.
"반."
"반이요?"
"끝까지 갔는데, 반만 갔다 왔어." 박씨는 그 이상한 문장을 설명하지 않았다. "내 얘긴 나중에 해줄게. 지금은 순서가 아니야. 너 먼저 확인할 게 있잖아."
"뭐요?"
"어머니 유품. 있을 거 아니야, 뭐라도. 사진이든 서류든." 박씨는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났다. "혈연이 맞는지 아닌지 넘겨짚지 말고 물건으로 확인해. 이 바닥 일은 넘겨짚으면 꼭 넘겨짚은 만큼 틀려."
박씨가 나가고 나는 찢긴 종이를 지갑에 넣었다. 명함 옆에. 지갑이 점점 이상한 것들의 보관함이 되어가고 있었다.
원룸에 돌아와서 벽의 사진을 내렸다. 액자 뒤판을 열어볼 생각이었다. 유품 상자는 누나와 같이 열기로 약속했지만, 액자는 상자가 아니니까. 그런 식의 셈은 치사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움직였다.
뒤판 고정쇠를 하나씩 젖혔다. 십사 년 만에 열리는 뒤판이었다. 사진을 꺼내는데 뒤판과 사진 사이에서 뭐가 툭 떨어졌다.
접힌 종이였다. 오래돼서 누렇게 변한.
나는 그걸 주웠고, 펴보지 않았다. 펴보려다가, 누나 얼굴이 떠올라서 멈췄다. 같이 열자던 약속은 상자였지 액자가 아니라는 치사한 셈과, 그래도 이건 같이 봐야 한다는 마음이 새벽 다섯 시까지 싸웠다.
종이는 접힌 채로 사진 액자 앞에 세워뒀다. 사진 속 적동리가 그 종이를 등지고 있었다.
— 12화에 계속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등장 지명·인물·업체는 모두 허구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