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12화. 사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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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주소》 — 연재 12화

누나가 먼저 전화를 했다. 화요일 낮, 물류센터 점심시간이었다.

"상자 가져와. 퇴원 못 기다리겠어."

무슨 일 있냐고 하니까 누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어젯밤에 외할머니 꿈을 꿨어. 미역국을 끓여주시더라. 근데 꿈에서 내가 그랬어. 할머니, 저 이제 이거 못 먹어요. 못 먹는 게 어딨냐고 웃으시는데… 부엌 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어. 발목까지. 할머니는 그냥 국만 끓이셨어."

토요일에 상자를 들고 병원에 갔다. 라면 박스만 한 상자였다. 십사 년 동안 이사 세 번을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안 열린 물건. 테이프가 누렇게 삭아 있었다.

간이 테이블에 상자를 놓고 누나가 테이프를 뜯었다. 나는 액자 뒤에서 나온 접힌 종이를 먼저 꺼내놓았다. 액자를 열게 된 경위를 말했더니 누나는 치사한 놈, 하고는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상자 안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어머니 지갑, 안경, 성경책, 사진 뭉치, 그리고 서류 봉투 몇 개. 우리는 사진부터 봤다. 대부분 우리가 아는 사진이었다. 우리 어릴 때, 아버지 젊을 때. 뭉치 맨 아래에 모르는 사진들이 있었다. 흑백과 빛바랜 컬러. 강가 마을. 초가와 슬레이트 지붕. 마당에 선 사람들.

누나가 그중 한 장을 집었다.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고 대문 앞에 서 있는 사진이었다. 대문 기둥에 문패가 붙어 있었는데 화질 때문에 읽히지 않았다.

"이거 엄마야." 누나가 말했다. "이 얼굴 알아. 엄마 처녀 때."

"그럼 아기는 누나겠네."

"뒤집어 봐."

사진 뒷면에 연필 글씨가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였다. 우리 남매는 그 필체를 안다. 알림장에, 도시락 쪽지에, 병원 동의서에 평생 봐온 글씨.

적동리 19-4 앞에서. 소윤이 돌 무렵.

병실이 조용했다. 옆 침대는 검사를 갔고, TV는 꺼져 있었다. 누나는 사진을 든 채로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그 여덟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적동리 19-4.

손님들이 부르는 주소. 지도에 없는 주소. 내비가 안내하던 주소. 그 주소 앞에서 어머니가 누나를 안고 웃고 있었다.

"도윤아." 누나 목소리가 낮았다. "너 이 주소 알지."

나는 처음으로 누나한테 다 말했다. 김 부장부터 노인까지, 파란 선과 젖은 소매와 사라지는 기록까지. 노트를 보여줬다. 누나는 끝까지 들었다. 도중에 딱 한 번 끼어들었는데, 창숙이네 손주 대목에서였다. 누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다 듣고 누나가 서류 봉투를 열었다. 등본과 보험 서류들 사이에서 편지 봉투가 하나 나왔다.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없는 봉투. 안에 편지지 한 장. 어머니 글씨였다. 날짜는 없었다.

"소윤이, 도윤이 보아라. 너희가 이걸 읽는다면 나는 대답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몇 가지만 적는다. 외갓집 일은 몰라도 된다. 알려고 하지 마라. 물가에 살지 마라. 밤 운전은 하지 마라. 누가 옛날 주소를 물어도 모른다고 해라. 미안하다. 설명해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명하지 않는 것 말고는 지켜줄 방법을 몰라서 미안하다. — 엄마"

밤 운전은 하지 마라.

누나가 그 줄에 손가락을 대고 나를 봤다. 나는 삼 년째 밤 운전을 하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금기 세 개 중에 하나를, 어머니가 남긴 빚 때문은 아니지만 누나가 남길 뻔한 빚 때문에, 매일 어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액자 뒤의 접힌 종이를 폈다. 누나와 같이.

종이는 편지가 아니었다. 등사판으로 민 옛날 인쇄물이었다. 위에 큰 글씨로 「이주 안내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청수댐 건설에 따른 이주 대상 가구 안내. 보상 절차, 이주 기한. 관공서 문서 특유의 건조한 문장들. 그 아래 대상 가구 목록이 있었다.

목록에서 19-4를 찾았다. 있었다.

적동리 19-4. 세대주 지OO. 비고란에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다른 집들 비고란은 비었거나 '완료'인데, 그 집만 붉은 도장이었다. 도장 글씨는 두 글자였다.

거부.

누나가 소리 내지 않고 그 글자를 짚었다. 나는 세대주 성을 봤다. 지씨. 외할머니 지창숙의 지.

우리는 한동안 말을 안 했다. 병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복도 카트 소리가 지나갔다. 이윽고 누나가 상자 뚜껑을 덮으면서 말했다.

"이제 알겠네. 없는 외가가 어디 있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이 취해서 부르는 주소, 내비가 안내하는 주소, 지도에서 지워진 주소.

우리 외갓집이었다.

— 1부 끝. 13화에서 2부 「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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