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3화. 계좌 이체
《동거인》 — 연재 3화
밀린 건 반드시 채워진다, 라고 적은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채우는 쪽으로 돌아갔다. 우유를 새로 샀고, 낮에는 집을 비웠고, 아침마다 삼백이 비어 있는 걸 확인했다. 규칙대로였다. 규칙이 있는 상대는 무섭기보다 이상한 거라고 지난주의 나는 적었는데, 그 문장엔 쓸모가 하나 더 있었다. 규칙이 있는 상대에게는, 문의가 가능하다.
이 집에는 관리자가 있다.
원계약자. 예람이가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 이 집을 예람이한테 빌려주고, 예람이가 나한테 방 하나를 다시 내준, 전대차 구조의 맨 위에 있는 사람. 보증금도 그 사람 계좌로 넣었고 월세도 그 계좌로 나간다. 도어락에 지문을 등록할 권한이 있는 사람도, 상식적으로는 그 사람뿐이다.
나는 먼저 제일 상식적인 가설부터 세워봤다. 낮에 오는 게 언니 본인이라는 가설. 자기 집이니까 지문이 등록돼 있고, 낮에 들러서 뭘 좀 쓰고 간다. 세워놓고 보니 기각할 이유가 셋이었다. 하나, 집주인이 세입자 우유를 매일 정확히 삼백씩 덜어 갈 이유가 없다. 둘, 그날 낮의 로그는 '실패'였다. 등록된 지문이면 집에 사람이 있든 없든 열린다. 사람이 있어서 못 여는 지문은 없다. 셋, 예람이의 그 얼굴. 집주인이 드나드는 정도의 일에 사람이 그런 얼굴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물어볼 데는 거기뿐이었다.
언니와의 문자 창을 입주하고 처음으로 열었다. 마지막 대화는 입주 전, 보증금 이체 확인이었다. "확인했습니다. 편히 지내세요." 그 위로도 대화는 몇 줄 없었다. 계좌번호. 입주일. 도어락은 쓰시던 대로 쓰시면 됩니다.
나는 저녁 아홉 시 십이 분에 보냈다. 문장을 고르느라 이십 분을 썼다. 안녕하세요, 예람이랑 같이 사는 서지우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도어락 앱에 낮 시간에 저희 둘 말고 출입 기록이 있어서요. 혹시 아시는 부분인지 여쭤봅니다.
답장은 자기 전까지 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확인했다. 와 있었다. 수신 시각, 새벽 두 시 오십일 분.
"안녕하세요. 낮 출입은 제가 아는 부분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채워두시면 됩니다."
채워두시면 됩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예람이가 첫날 밤에 한 말과 같았다. 채워두면 돼. 아는 사이끼리 같은 말을 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같은 말을 쓴다는 건, 같은 데서 배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 통을 더 보냈다. 이번엔 보내는 시간을 바꿨다. 하나는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출근길 지하철에서. 지문이 누구 걸로 등록돼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하나는 낮 열두 시 삼십 분, 회사 탕비실에서. 낮에 오시는 분과 한번 얘기해볼 수 있을까요.
답장은 두 통 다 다음 날 새벽 두 시 오십일 분에 왔다. 일 분 차이도 아니고, 같은 분에.
"등록은 계약 전부터 있던 것입니다. 지우거나 바꾸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채워두시면 됩니다."
"만나시는 건 어렵습니다. 낮에는 집을 비워두시는 게 서로 편합니다. 채워두시면 됩니다."
세 통. 전부 세 문장. 전부 마지막 문장이 똑같았다. 그리고 전부 새벽 두 시 오십일 분. 내가 밤에 보내든 아침에 보내든 낮에 보내든. 정각도 아니고 오십일 분이라는 게 이상하게 더 걸렸다. 사람이 답장하는 시각은 생활에서 나온다. 퇴근하고 나서, 자기 전에, 신호 대기에 걸렸을 때. 그래서 흩어진다. 매일 같은 분에 오는 답장은 생활이 아니라 일정이다.
규칙이 있는 상대는 무섭지 않다고 적은 적이 있다. 정정한다. 규칙밖에 없는 상대는 무섭다.
이십오일은 월세일이다. 나는 자동이체를 안 쓴다. 매달 직접 보내면서 잔고를 눈으로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점심시간에 은행 앱을 열고 즐겨찾기 계좌를 눌렀다. 이체 확인 화면에 예금주명이 떴다.
문주연.
보증금 넣을 때도 봤던 이름이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언니 이름을 몰랐으니까. 예람이는 언니를 언제나 그냥 '언니'라고 불렀고, 나는 굳이 물은 적이 없었다.
이체 완료, 열두 시 사십일 분. 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문자가 왔다.
"확인했습니다."
열두 시 사십이 분이었다. 한 문장. 일 분 만에.
나는 탕비실에 선 채로 답장 시각들을 다시 넘겨봤다. 질문에는 새벽 두 시 오십일 분에 답이 온다. 돈에는 일 분 만에 답이 온다. 이것도 규칙이었다. 규칙이 하나 늘었는데, 이번에는 차분해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겹치는 시간에 예람이가 라면을 끓였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언니 이름이 뭐야? 나 문자도 하는 사이인데 이름도 몰라."
"문주원." 예람이가 면을 저으며 말했다. "왜?"
"계좌 예금주는 문주연이던데."
"언니 개명했댔어. 주연이 옛날 이름이야."
즉답이었다. 나는 취업 준비하면서 면접 스터디를 반년 했다. 그래서 안다. 준비한 답은 빠르고 매끄럽다. 준비 안 한 답은 반 박자 늦고, 어, 라든가, 그게, 가 붙는다. 예람이는 요즘 나랑 말할 때 반 박자씩 늦는 애가 됐다. 우유 얘기, 낮 얘기, 다 그랬다. 그런데 이 대답만 빨랐다.
"언제 개명했대?"
"몰라, 옛날에." 예람이가 냄비를 들고 식탁으로 왔다. "언니는 원래—"
거기서 끊었다. 예람이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결국 다른 말을 했다. "면 붇는다. 먹자."
출근하면서 예람이는 버릇처럼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한 번 흔들어 보고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그날따라 길었다.
밤에 나는 언니에게 한 통을 더 보냈다. 질문이 아니었다. 질문에 반만 답하는 사람이 인사에는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늘 감사해요, 언니. 좋은 밤 되세요.
답장은 새벽 두 시 오십일 분에 왔다.
"네. 좋은 밤 되세요. 채워두시면 됩니다."
아침에 그걸 읽고, 나는 가계부 옆 종이에 적었다.
답장 네 통. 전부 새벽 2시 51분. 전부 세 문장. 마지막 문장은 네 번 다 같음.
사람은 같은 말을 네 번 똑같이 쓰지 않는다. 인사에까지 붙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개명을 하면 은행 예금주명도 새 이름으로 바뀐다. 신분증이 바뀌니까 계좌가 따라 바뀐다. 바꾸는 걸 잊을 수는 있다. 그런데 다달이 이십오일마다 남의 월세를 받는 계좌를, 몇 년째 옛날 이름인 채로 두는 사람은 잘 없다. 나는 이 계좌로 두 번 보냈지만 예람이는 수십 번은 보냈을 거다. 은행 가서 이름 바꾸는 십 분이, 그 몇 년 동안 없었던 사람.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다. 있긴 한데, 나는 어긋난 셈을 못 견디는 사람이다.
— 4화에 계속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등장 지명·인물·건물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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