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19화. 이사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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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인》 — 연재 19화

수칙 7번을 읽은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다. 채우는 사람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채우는 사람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나는 방을 빼기로 했다.

주말 이틀 동안 원룸 다섯 개를 봤다. 죄다 시세대로였다. 보증금 오백에 오십오, 관리비 칠만. 두 달 전의 나라면 한숨부터 나왔을 숫자인데, 이상하게 반가웠다. 제값이라는 게 이렇게 안심되는 물건인 줄 몰랐다. 제값에는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역에서 십이 분 거리 삼 층짜리를 골랐다. 부동산에서 가계약금 오십을 걸기로 했다. 화요일 점심에 이체하기로 하고, 월요일 저녁에 예람이한테 말했다.

나 방 뺄게. 다음 달까지만 있을게.

예람이는 저녁을 먹다가 수저를 내려놨다. 화를 내거나 울 줄 알았다. 예람이는 둘 다 안 했다. 대신 이상할 만큼 차분하게, 준비된 것도 즉흥도 아닌, 오래 알고 있던 사실을 꺼내는 말투로 말했다.

"나가는 건 돼. 근데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왜.

"너 밀린 거 있잖아."

나는 수저를 든 채로 멈췄다. 실험한 사흘. 견과 세 봉. 하루 몫이 성인 하루치라는 걸 계산한 건 나다. 견과 한 봉은 이백 칼로리다. 사흘치 몫에서 견과 세 봉을 빼면, 잔액이 남는다. 시계 같은 걸로 한꺼번에 정산되지 않은, 아직 걸려 있는 밀린 값.

"밀린 채로 나가면, 그게 너를 따라가."

예람이가 말했다. 회사 서랍 얘기를 우리 둘 다 떠올리고 있었다. 사십 분 거리 잠긴 서랍까지 오는 것한테 이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주소 이전이 무슨 의미가 있나.

"네가 전화했다던 사람." 예람이가 말했다. "재작년에 나간 사람. 그 사람이 왜 네 전화를 뚝 끊었게. 나간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연락이 안 되게. 나가서 끝난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래. 나가서도 계속인 사람들이라서."

나는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데. 밀린 걸 다 갚으면 돼?

예람이는 이번엔 대답을 골랐다. 오래. 그리고 고른 대답이 이거였다.

"…밀린 걸 갚는 건 기본이고. 그다음이 있어. 근데 그건 나도 정확히는 몰라. 언니가 그 부분은 안 가르쳐줬어."

안 가르쳐준 게 아니라 못 가르쳐줬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르쳐주고 나간 사람이 없으니까.

화요일 점심에 나는 부동산 앞까지 갔다. 유리문 너머로 소장님이 서류를 준비해놓고 있는 게 보였다. 은행 앱을 열고, 이체 화면에서 오십만 원을 찍고, 받는 분 성함을 확인하고, 보내기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그리고 나는 견과 봉지를 생각했다. 잠긴 서랍을. 세 시간 십이 분을. 물건 말고, 를.

새 원룸으로 이사한 첫날 밤을 상상해봤다. 낯선 천장, 새 도어락.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 확인하게 될 것들. 냉장고, 시계, 서랍. 나는 이미 매일 아침 뭔가를 세는 사람이 됐다. 장소를 옮긴다고 세는 습관이 없어지나. 세는 습관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나는 어디 살아도 이 집에 사는 거다.

밀린 채로 나가면 그게 따라온다. 그 문장의 무서운 점은 반대쪽에 있다. 안 밀리려면 채워야 한다. 채우는 동안은 채우는 사람이다. 채우는 사람은 그만두면 안 된다. 7번.

빠져나가는 문이 다 안쪽으로만 열리는 구조였다.

나는 이체를 취소하고 부동산에 들어가서, 죄송하다고, 사정이 생겨서 계약을 못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장님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집에 오는 버스에서 가계부 앱 대신 메모장을 열고 적었다.

가계약 취소. 위약 도의상 5만원 입금함.
나가는 조건: ①밀린 것 청산 ②"그다음"(예람도 모름 or 말 안 함)
이 집 보증금은 들어올 때 내는 게 아니라 나갈 때 내는 것.

그날 밤 나는 우유를 채우고 낮 시간을 비웠다. 규칙대로. 규칙대로 하는 것 말고 다른 걸 하기로 결심하면서, 규칙대로 했다.

나가는 문이 안쪽으로 열린다면, 안쪽을 알아야 한다.

— 20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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