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18화. 수칙 7번
《동거인》 — 연재 18화
변명부터 하자면, 나는 사흘을 참았다.
식구 명단에 내가 올라 있다는 걸 안 날부터, 접힌 7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6번까지는 채우는 방법이다. 접어놓은 하나만 다른 얘기일 거다. 채우지 못했을 때의 얘기. 시계와 견과와, 예람이가 끝을 안 낸 문장들이 전부 그 접힌 줄 안에 있을 거였다.
보여달라고 두 번 말했다. 예람이는 두 번 다 고개를 저었다. 몰라도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나은 거야. 그 말은 이상한 말이다. 모르는 게 나은 정보는, 보통 이미 나한테 적용되고 있는 정보다.
예람이가 샤워하는 이십 분 동안, 예람이 지갑은 식탁 위에 있었다.
나는 남의 지갑을 열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게 자랑이 아니라 그냥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물소리가 나는 동안 나는 식탁 앞에 서서 내 기본이 닳아 없어지는 걸 지켜봤다. 이 집에 살면서 나는 남의 냉장고 칸을 넘겨봤고, 남의 방을 열었고, 남의 새벽을 훔쳐봤다. 지갑 하나가 더해진다고 죄목이 늘어날 단계는 지났다.
카드 칸 맨 안쪽. 격자로 접힌 종이. 나는 그걸 꺼내서 폈다. 굳은 접힌 자국이 저항하다가 열렸다. 삼 초.
7. 채우는 사람이 채우기를 그만두면, 그 사람의 몫을 가져간다. 물건 말고.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한 번 읽으면 경고문이다. 두 번 읽으면 계약서다. 세 번 읽으니까 문장의 무게가 어디에 실려 있는지 보였다. 마지막 두 어절. 물건 말고.
앞의 여섯 항목은 전부 물건의 언어로 쓰여 있다. 우유 300, 하루, 이틀. 7번만 물건의 반대말로 끝난다. 물건 말고. 물건이 아닌 것. 시계에서 가져간 건 시계가 아니라 세 시간 십이 분이었다. 물건이 아닌 것의 목록은 거기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나는 모른다. 그 목록의 끝에 뭐가 있는지도. 아니, 안다. 모른다고 쓰고 싶을 뿐이다.
채우는 사람이 채우기를 그만두면, 그 사람의 몫을 가져간다.
그 사람의, 몫을.
물소리가 멎었다. 나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 접어서 돌려놓고 모른 척할 수 있는 시점은 문장을 읽기 전까지다. 나는 종이를 편 채로 식탁에 앉아서 예람이를 기다렸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온 예람이가 식탁을 보고 멈췄다. 지갑, 종이, 나. 순서대로 보고, 마지막에 다시 종이를 봤다. 예람이 얼굴에서 변명이 지나가고, 화가 지나가고, 마지막에 남은 건 피로였다.
"…봤네."
시계가 이거였어? 하고 나는 물었다. 목소리를 낮게 유지하는 데 힘이 다 들어갔다. 회사 서랍도. 그만두면 나를 가져간다는 걸 알면서, 나한테는 우유만 채우면 된다고 했어?
"겁주기 싫었어." 예람이가 수건을 벗어 쥐었다. "그리고 그만둘 일 없게 하면 되니까. 채우면 아무 일도 없어. 삼 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지우야."
지키라고. 나는 종이를 들었다.
"이건 규칙이 아니야. 규칙은 어기면 벌금을 내. 이건 어기면 나를 내.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볼모라고 불러."
예람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건 물어야 했다.
"언니는 그만뒀어? 그래서 없어진 거야?"
예람이가 나를 봤다. 그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예람이가 대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대답을 참는 걸 봤다. 한참 만에 예람이 입에서 나온 문장은 반쪽이었다.
"언니는… 그만둔 게 아니야."
그럼 뭔데.
"그만둔 게 아니라고." 예람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반대야. 언니는—"
예람이는 끝을 못 냈다. 이번에는 안 낸 게 아니라 못 낸 거였다. 예람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고, 나는 식탁에 7번과 함께 남았다.
가계부 옆 종이에는 그날 딱 한 줄을 적었다.
7. 채우는 사람이 채우기를 그만두면, 그 사람의 몫을 가져간다. 물건 말고.
옮겨 적는 데 손이 두 번 멈췄다. 물건, 에서 한 번. 말고, 에서 한 번.
— 19화에 계속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등장 지명·인물·건물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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