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재기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전세로 들어온 빌라를 셀프 도배 하다가, 안방 벽지 밑에서 키재기 눈금을 발견했다.
연필로 그은 가로선과 날짜, 삐뚤빼뚤한 글씨. 흔한 풍경이라 웃었다. 우리 애 눈금은 지우지 말고 남겨둘까 싶었다.
105cm, 여섯 살.
112cm, 일곱 살.
119cm, 여덟 살.
눈금은 위로 이어졌다. 나는 의자를 밟고 벽지를 마저 뜯다가 손을 멈췄다.
134cm. 아홉 살.
151cm. 아홉 살.
173cm. 아홉 살.
날짜 간격이 이상했다. 아홉 살의 눈금 세 개는 같은 해 여름, 보름 사이에 몰려 있었다.
192cm. 날짜 없음.
그다음 눈금은 문틀 높이를 넘겼다. 천장 몰딩 바로 아래, 손이 닿을 리 없는 높이에 마지막 가로선이 있었다. 선 옆에는 키 대신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어른 글씨였다. 눌러 써서 벽이 패어 있었다.
"그만 컸으면"
나는 벽지를 도로 붙였다. 풀도 안 바르고, 테이프로, 위에서부터 서둘러.
그날 밤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안방 천장에서 누가 등을 굽히고 자? 나는 대답 대신 아이 방에 가서 같이 잤다.
아침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테이프로 붙인 벽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눈금이 다 드러나 있었다.
몰딩 아래 마지막 가로선 위로, 연필선 하나가 새로 그어져 있었다. 천장을 넘어, 천장 면을 따라, 방 한가운데까지.
선 끝은 우리가 요를 깔고 자던 자리 바로 위에서 멈춰 있었다.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