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50화(최종). 새벽 네 시

조회 1댓글 03시간전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읽어주기

《없는 주소》 — 연재 50화 · 최종화

누나의 수술은 가을에 있었다.

잘 됐다. 담당의는 경과가 교과서 같다고 했다. 누나는 퇴원하고 우리 원룸 근처로 방을 얻었다. 남매가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사는 건 처음이었다. 누나는 요즘 미역국을 자주 끓인다. 참기름을 마지막에 두른다. 뜬다. 정말로.

빚은 아직 있다. 병원비라는 게 수술이 끝났다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밤에 뛴다. 낮에는 물류센터, 밤에는 대리. 달라진 건 하나다. 이제 밤 운전이 금기가 아니라는 것. 어머니의 금기 세 개 중에 마지막 하나는, 그 운행이 완료되던 새벽에 함께 만료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금기는 빚이 있는 집의 규칙이었으니까.

이상 콜은 그 뒤로 한 건도 없다.

끝자리는 늘 0이다. 나는 그래도 버릇처럼 콜 화면의 끝자리를 본다. 반 초씩. 검수 습관은 은퇴가 없다.

쉼터는 그대로다. 박씨는 여전히 커피를 반만 마시고, 요즘은 신입 기사들한테 잔소리를 한다. 졸음 오면 무조건 세워라, 새벽엔 국도 조심해라. 리스트 얘기는 안 한다. 필요 없는 시대가 왔으니까. 다만 박씨 지갑에 그 수첩 장이 아직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내 지갑에 명함과 물풀 잎이 아직 있는 것처럼. 그런 건 버리는 게 아니다. 끝난 일의 증거가 아니라, 있었던 일의 증거니까.

유정과는 한 달에 한 번쯤 낮에 커피를 마신다. 유정은 이제 낮이 또렷하다. 새 직장도 구했다. 뭐 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그랬다. 낮 상담원이요. 이번엔 진짜 회사예요. 명함도 있어요. 명함을 받아서 나는 지갑에 넣었다. 지갑 속 물건들의 결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마지막으로 적는다.

금요일 새벽, 정상 콜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이었다. 취객 하나를 막 내려준 참이었다. 그 손님이 차에서 자면서 잠꼬대를 했었다. 적동…까지 하고 잠들었다. 나는 백미러로 봤다. 손님은 도로 잠들었고, 깨서는 자기 집 주소를 멀쩡히 댔다. 내려줄 때 소매를 봤다. 말라 있었다. 잠꼬대는 그냥 잠꼬대가 된 시대였다.

복귀 국도에서, 내비가 켜졌다.

혼자서.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액셀에서 발을 뗐다. 화면에 파란 선은 없었다. 지도도 없었다. 검은 화면에 소리만 나왔다.

"목적지 주변입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유정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유정의 목소리라기엔 더 오래된 억양이 섞여 있었다. 미역국을 끓여주던 사람의 억양 같기도 했고, 마루에서 밥은 먹었냐고 묻던 억양 같기도 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적지 않겠다. 확실하지 않은 건 안 적는 게 이 기록의 원칙이고, 어떤 것들은 확실하지 않은 채로 두는 게 예의다.

목적지 주변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생각했다. 내 목적지는 원룸이었고, 원룸은 아직 이십 분 거리였다. 그러니까 그 안내는 틀린 안내다. 틀린 안내인데, 이상하게 맞는 말 같았다. 삼 년을 헤맨 사람한테 하는 말로는.

다 왔다는 말. 잘 도착해간다는 말.

화면은 꺼졌고, 다시 켜지지 않았다. 나는 히터를 한 칸 올리고, 라디오를 틀었다. 새벽 라디오에서 오래된 가요가 나왔다. 창밖으로 운평의 새벽 거리가 지나갔다. 셔터 내린 가게들, 첫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물류 트럭. 내가 삼 년째 운전하는, 지도에 다 있는 길들.

원룸 앞에 차를 세운 게 네 시였다.

새벽 네 시. 한때는 경계선이던 시각. 이제는 그냥 퇴근 시간이다. 나는 시동을 끄기 전에 버릇대로 백미러를 봤다. 한 번. 각도를 잡고, 다시 한 번.

뒷좌석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다는 게 쓸쓸한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 내려드렸다는 말이었다. 기사의 하루가 잘 끝났다는 말. 나는 시동을 껐다.

내일도 콜은 뜰 거고, 나는 받을 거다. 세워달라는 데 세워드리고, 도착했다는 데서 내려드리면서. 그 일을 나는 꽤 잘한다. 물려받은 재주인지도 모른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사람을 건너다주는 일에 소질이 있었으니까.

— 끝 —

《없는 주소》 전 50화 완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등장 지명·인물·업체는 모두 허구입니다.

#연재#대리운전#심야#도시괴담#완결
창작괴담 목록으로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