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37화. 회피의 값
《없는 주소》 — 연재 37화
가기로 마음은 정했다. 그래도 안 가는 선택지를 검증은 해야 했다. 검수의 원칙이다. 채택할 안이 정해져 있어도 기각할 안의 기각 사유를 문서로 남긴다. 나중에 누가 왜 그 길밖에 없었냐고 물으면 보여줄 수 있게.
D-6. 앱을 지워봤다.
삭제는 됐다. 삼십 초 뒤에 폰이 부르르 떨렸다. 예약 알림이었다. 앱이 없는 폰에 앱 알림이 왔다. 알림을 누르니 앱스토어가 아니라 그 예약 화면이 바로 열렸다. 나는 폰을 초기화해봤다. 공장 초기화 후 첫 부팅, 계정 로그인도 하기 전에, 설정 마법사 화면 위로 알림이 떴다. 예약 운행 안내. D-6.
기각 사유: 배차는 기기에 있지 않다.
D-5. 차를 없애봤다.
내 차는 십 년 된 경차다. 대리 뛸 때 이동용으로 쓰는. 중고 플랫폼에 내놨더니 하루 만에 연락이 왔다. 시세보다 후하게 쳐주겠다는 사람이었다. 약속을 잡았다. 약속 시간 십 분 전에 문자가 왔다. 죄송한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두 번째 구매자도 같은 문자를 보냈다. 세 번째는 아예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를 하니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분명히 통화했던 번호였다.
기각 사유: 운행은 차에 있지도 않다. 차는 팔려도 운행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저쪽은 내 차가 팔리는 것 자체를 막고 있다. 기사에게는 차가 필요하니까.
D-4. 유정에게 물었다.
새벽 두 시 사십 분. 유정은 내 실험들을 다 듣고 나서, 한숨 비슷한 걸 쉬었다.
"기사님. 네 번째 완주자 아시죠. 언덕 집."
"네."
"그분이 원래 네 번째가 아니었어요. 원래 순번이 따로 있었어요. 그 순번인 기사가 피했어요. 기사님처럼 앱을 지우고, 차를 팔고, 이사도 갔어요. 멀리.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 손님이 갔어요."
수화기 너머의 침묵이 무거웠다.
"그 회차에 배정돼 있던 손님이요. 기사가 안 오니까, 손님이 혼자 갔어요. 취한 밤에, 자기 차를 자기가 몰고. 그 손님은 물가까지 못 갔어요. 국도에서 끝났어요. 기사 없이 가는 길은 그 길이 그렇게 돼요." 유정의 목소리는 평평했는데, 평평하게 유지하는 데 힘이 드는 평평함이었다. "그래서 언덕 집 그분이 대신 순번을 받았어요. 자원해서요. 자기 회차의 손님을 자기가 지키겠다고. 그분이 지금도 물가를 지키는 건 그 연장이에요."
나는 부모님의 국도를 생각했다. 기사 없이 간 길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 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가 피하면, 제 회차의 손님이 혼자 가겠네요."
"기사님 회차의 승객이 누군지, 이제 아시잖아요."
젖은 환자복 소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누나는 운전 못 해요. 면허도 없어요."
"승객은 운전하지 않아요. 걸어서라도 가요. 병실 문이 잠겨 있어도요." 유정은 박씨 어머니의 요양원 얘기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알 것이다. 이 사람은 새벽의 관제니까. "기사님. 회피의 값은 기사가 안 내요. 그게 이 배차의 제일 나쁜 조항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가는 게 제일 싸네요."
"…네. 이상한 위로지만, 기사님 회차는 그래도 나아요. 데리러 가는 운행이잖아요. 저쪽이 기사님을 해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기사님은 삼십 년 만에 오는 마중이에요."
전화를 끊고 나는 노트에 사흘 치 실험 결과를 정리했다.
회피 경로 검증 결과: 전 항목 기각.
기각 사유 요약: 회피의 값은 내가 아니라 소윤이 낸다.
채택안: 예약 운행 수행. D-4.
적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졌다. 선택지가 없다는 건 무서운 일인데, 선택지가 없다는 걸 문서로 확정하고 나면 사람은 실무로 넘어간다. 나는 실무의 인간이다. 남은 나흘 동안 할 일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박씨에게 인수인계 받을 것. 유정에게 출발 절차 확인할 것. 누나에게 전부 말할 것. 차 정비소 다녀올 것. 엔진오일, 타이어, 와이퍼.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차는 이쪽 물건이니까 이쪽 정비를 받아야 한다.
목록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었다.
가져갈 것은 없는 운행이다.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 빈 뒷좌석으로 가는 거니까. 뒷좌석을 깨끗이 치워둘 것.
— 38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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