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8화. 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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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인》 — 연재 8화

예람이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 날 저녁, 겹치는 시간에.

식탁에 마주 앉아서 예람이는 지갑을 꺼냈다. 카드 칸 맨 안쪽에서 종이가 나왔다. 여러 번 접었다 편 자국이 격자로 난, 줄노트를 찢은 종이. 지갑에 넣고 다녔다는 게 먼저 보였다. 집에 두는 것도, 폰으로 찍어두는 것도 아니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종이.

예람이가 그걸 펴서 내 쪽으로 돌려놨다.

손글씨였다. 또박또박한,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 글씨. 여자 어른의 글씨라는 인상. 맨 위에 제목도 뭣도 없이 바로 번호부터 시작했다.

1. 하루 몫은 하루에 채운다. 우유 300 기준.
2. 낮 1시부터 3시까지 집을 비운다.
3. 큰방 문은 열지 않는다.
4. 몫을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는다. 하던 대로만 한다.
5. 말을 걸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도.
6. 집을 이틀 이상 비우지 않는다.

여섯 번째 항목 아래에서 종이가 접혀 있었다. 뒤로 넘긴 게 아니라 안으로, 두 번 접어서 일곱 번째 줄이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접힌 자리가 하도 오래돼서 종이가 그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세 번 읽었다. 읽을수록 이상한 종이였다. 겁주는 단어가 한 개도 없었다. 무서워하는 문장도 없었다. 그냥 관리 수칙이었다. 정수기 필터 가는 법 같은. 이 종이를 쓴 사람은 이 일을 무서워하는 단계를 오래전에 지나서, 운영하는 단계에 있었다.

4번에서 나는 선반 생각을 했다. 늘리지도 줄이지도. 내가 몫을 차려줬을 때 방문이 두 번으로 늘었던 것. 5번에서는 잠깐 숨을 멈췄다. 말을 걸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도.

말을 걸면 알아듣는 상대라는 뜻이잖아, 그거.

"7번은?"

내가 접힌 부분에 손을 대자 예람이가 종이를 뺐다. 빠르지도 거칠지도 않게, 그냥 조용히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그건 몰라도 돼. 우리랑 상관없는 거야."

상관없는 걸 왜 접어놨을까. 나는 그 말을 삼켰다. 대신 물었다.

"이거 언니 글씨야?"

예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를 접어 지갑에 도로 넣었다. 그러고는 예람이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래 준비한 말 같았다.

"나 이 방, 반값에 받았어. 언니가 그랬어. 대신 조건이 있다고. 채우는 거. 수칙대로 하는 거. 그게 다야. 나는 그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 반값이면 뭐든 하지, 그랬지."

예람이가 손톱 옆을 뜯었다.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별거 아니야, 진짜로. 우유 사고, 낮에 비우고. 그게 다야. 몇 달 하니까 그냥… 공과금 같았어."

공과금. 내가 가계부에 적은 그 단어를 예람이 입에서 들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같은 단어에 도착하는구나.

"근데 왜 말 안 했어. 나한테."

"말하면 네가 나가니까."

예람이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얼굴이 됐다. 내가 나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까지 말해버린 거다. 예람이는 서둘러 덧붙였다. 월세를 혼자 감당 못 해서, 라고. 그럴듯했고, 아마 반쯤은 사실일 거다.

반쯤은.

그날 밤 나는 오래 못 잤다. 이상하게,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화가 절반밖에 안 났다. 나머지 절반은 안도였다. 한 달 반 동안 나는 내가 이상해진 건가를 매일 의심했다. 우유에 매직으로 선을 긋고 도어락 로그를 캡처하는 사람. 그런데 수칙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겪은 사람이 둘이나 있고, 한 명은 그걸 항목으로 정리까지 해놨다. 이 집에서 미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빚처럼, 안도 뒤에 계산이 따라왔다.

내 방도 반값이다. 예람이는 반값의 조건을 알고 이 방을 받았다. 나는 조건을 모르고 받았다. 조건을 모르는 사람한테 반값에 방을 내주는 걸, 뭐라고 부르더라.

나는 그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그날 밤엔 그럴 힘이 없었다.

가계부 옆 종이에 적었다.

수칙 7항 중 6항 확인. 7번 접힘.
언니: 겪은 사람. 예람: 아는 사람. 나: 몰랐던 사람.
월세의 나머지 반은 우유로 내는 중이었음.

밀린 사흘치는, 그날 밤에도 오지 않았다. 닷새째였다.

— 9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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