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38화. 마지막 수칙
《동거인》 — 연재 38화
결정을 예람이한테 말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나는 문주연을 만나러 갔다. 이번엔 혼자.
문주연은 내 계획을 끝까지 들었다. 예람이를 내보내고 내가 남는다는 것. 예람이 몫까지 채우면서 정산을 미룬다는 것. 창구의 승인까지 받았다는 것. 다 듣고 나서 문주연이 처음 한 말은 반대도 찬성도 아니었다.
"너 그 글 아직 안 올렸구나."
구인글이요? 안 올렸어요. 안 올릴 거고요.
"그게 네 진짜 결정이네." 문주연은 창밖을 봤다. "남는 건 그다음 문제고."
그리고 문주연은 자기 얘기를 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갚아야 할 것을 갚는 사람처럼.
"나는 넘기고 나온 사람이잖아. 이십 년 됐어. 이십 년 동안 하루도 그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어. 내가 주원이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언니 결혼하고 나가니까 네가 엄마아빠 좀 도와라. 그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자다가도 외워. 넘기고 나간 사람은 평생 그 글을 잊지 못해. 구인글이든, 부탁이든, 뭐든. 넘길 때 쓴 문장을."
문주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사람이 마시는 걸 처음 봤다.
"우리 집 냉장고 메모 봤지. 우유 300. 나 지금도 매일 사. 마시지도 않을 우유를 이십 년째. 남편은 내가 우유를 좋아하는 줄 알아. 애들도. 나는 우리 집 식구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매일 한 사람 몫을 사다 버려. 그게 나간 값이야. 나가면 끝나는 게 아니라, 나간 채로 계속하는 거야. 평생."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내가 물었다. 문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계획이 내 것보다 나아서 샘이 난다는 얘기야."
문주연은 웃었는데 눈은 안 웃었다.
"나는 도망쳤고, 주원이는 들어갔고, 너는 남겠다는 거잖아. 셋 중에 남는 게 제일 나아. 제일 힘들고." 그리고 문주연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다시 들어갈게."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문주연은 진지했다. 애들도 다 컸고, 자기는 원래 그 집 사람이고, 밀린 건 어른이 갚는 거라고 외할머니도 그랬다고. 예람이도 내보내고 너도 나가라고. 이건 우리 가족 일이라고.
나는 거절했다. 생각할 시간도 필요 없었다.
"그건 순서가 아니라 반복이에요."
문주연이 나를 봤다.
"외할머니가 들어가고, 언니가 들어가고, 이제 주연 님이 들어가고. 그다음은요? 그 방이 한 명씩 받는 걸 이 집안이 이십 년 넘게 봤잖아요. 들어가는 걸로 갚는 건 갚는 게 아니라 이자만 무는 거예요. 원금이 안 줄잖아요." 나는 내 가계부를 꺼내서 식탁에 올렸다. "저는 이 집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이 일을 슬픔으로 안 하고 장부로 할 수 있어요. 주연 님네는 다 슬픔으로 하잖아요. 슬픔은 원금을 못 갚아요."
말해놓고 너무 심했나 싶었는데, 문주연은 화내지 않았다. 대신 오래 조용하다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접힌 종이였다. 낡은.
"그럼 이건 네가 가져야겠다."
수칙 두 번째 장의 원본이었다. 나가는 사람에게. 네 항목.
"이건 나가는 사람들 것이었어. 아버지가 나한테 줬고, 나는… 주원이한테 못 줬지. 넘기는 게 뭔지 알려주는 문서니까, 넘길 사람한테만 전해졌어." 문주연이 내 손에 종이를 쥐여줬다. "너는 안 넘기겠다며. 그럼 이 문서의 다음 주인이 없어. 네가 갖고 있다가, 언젠가 이게 필요 없는 날이 오면, 태워."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그 종이를 폈다 접었다 했다. 필요 없는 날이 온다면 그건 어떤 날일까. 몫이 끝나는 날. 창고방이 그냥 방이 되는 날. 그런 날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처음으로, 이 이야기의 끝을 상상하는 사람이 이 계보에 생겼다는 건 알았다. 그게 나라는 것도.
가계부 옆 종이에 적었다.
문주연 제안(재입주): 거절. 사유: 반복은 상환이 아님.
수칙 2장 원본 인수. 소각 조건부.
확인한 것: 넘기고 나간 값 = 평생. 남는 값 = 미정. 미정인 쪽을 고른다.
— 39화에 계속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등장 지명·인물·건물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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