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32화. 정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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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인》 — 연재 32화

수칙 원본은 문주연에게 있었다.

정확히는, 아버지 노트에 끼워져 있었다. 노트를 우리한테 주고 간 뒤에 문주연이 집에서 발견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노트 뒤표지 안쪽에 봉투가 붙어 있었고, 그 안에 반으로 접힌 종이 두 장이 있었다고 했다.

첫 장은 우리가 아는 수칙이었다. 언니 필체의 일곱 항목. 예람이가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과 같은 내용. 그러니까 예람이가 받은 건 사본이었다.

두 번째 장이 문제였다. 우리는 주말에 문주연의 집으로 갔고, 실물을 받았다. 같은 필체, 같은 종이. 맨 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가는 사람에게**

그 아래 네 항목이 있었다.

1. 밀린 것 없이 나가라. 밀린 채 나가면 어디까지든 따라간다.
2. 자리를 비우지 말고, 넘겨라. 채우는 사람이 끊기지 않으면 정산은 미뤄진다. 미뤄진 정산은 남는 사람의 것이 된다.
3. 넘겨받는 사람에게 조건을 먼저 말하지 마라. 알고 오는 사람은 자리가 받지 않는다.
4. 넘기고 나간 뒤에도 네 몫은 네가 채워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나간 값이다.

우리 셋은 그 종이를 가운데 놓고 오래 앉아 있었다.

2번이 나가는 방법이었다. 후임을 들이면 나갈 수 있다. 언니가 예람이를 들인 구조, 그 글이 나를 뽑은 구조가 이 한 줄에서 나온 거였다. 이 자리는 도망칠 수 없는 게 아니었다. 도망칠 수 있게 설계돼 있었다. 다음 사람을 넣는 조건으로. 감옥이 아니라 다단계에 가까운 구조. 탈출구가 있는데, 탈출구가 제일 잔인한 부분인 구조.

3번에서 예람이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알고 오는 사람은 자리가 받지 않는다. 예람이가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게 성격이나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규칙이었다. 말하면 내가 안 받아졌을 거고, 안 받아지면 예람이는 계속 혼자였을 거다. 침묵이 모집 조건이었다.

"그래서 못 썼구나." 예람이가 말했다. 눈물을 닦지도 않고, 어딘가 개운한 목소리였다. "구인글. 나는 조건을 안 쓰고는 못 쓰겠어서 몇 달을 못 올렸는데. 쓰면 안 되는 거였어. 그러니까 그게… 나 대신 올린 거야. 조건 없이."

4번은 문주연의 항목이었다. 문주연은 자기 냉장고의 우유 300 메모에 대해 그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넘기고 나온 사람이야."

이십 년 전, 결혼을 앞두고 문주연은 이 자리를 넘겼다. 누구한테? 주원이한테. 부모님이 계셨지만 아버지 몸이 꺾이기 시작한 때였고, 셋 중 누군가는 남아야 했고, 문주연은 그때 처음으로 수칙의 이 두 번째 장을 아버지한테서 받았다고 한다.

"주원이한테 말 안 했어. 3번 때문에. 그냥, 언니 결혼하고 나가니까 네가 엄마아빠 좀 도와라, 그렇게만 했어. 걔는 그러겠다고 했어. 웃으면서." 문주연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나는 내 동생한테 이 자리를 넘기고 나왔어. 그리고 이십 년째 매일 우유를 사. 4번 때문이 아니야. 4번은 핑계고, 그거라도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나는 조수석에서 그 종이를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이 문서의 제일 이상한 점이 도드라졌다.

이 종이는 나가는 사람을 위한 배려처럼 쓰여 있다. 그런데 항목마다 남는 쪽의 피가 배어 있다. 미뤄진 정산은 남는 사람의 것이 된다. 알고 오는 사람은 받지 않는다. 나간 뒤에도 채워라. 나가는 법을 알려주는 문서가 아니라, 나가는 일이 무엇을 대가로 하는지 기록한 문서였다.

그리고 이제 선택지가 우리 앞에 놓였다. 처음으로, 진짜로.

나갈 수 있다. 누군가를 데려오면.

월세 인상 통보를 받고 사십 분 만에 쪽지를 받는 누군가. 혼자 살고, 가족이 멀고, 급하고, 착실한 누군가. 다섯 달 전의 나 같은 사람.

그날 밤 가계부 옆 종이에 적었다.

나가는 법: 확보. 대가: 사람.
문주연 — 동생에게 넘기고 20년째 갚는 중.
언니 — 받아서 지키다, 자기로 정산.
예람 — 못 넘기고 침묵. 시스템이 대행.
나 — ?

물음표 앞에서 펜을 멈췄다. 이제부터 적어야 하는 것은 이 물음표다.

— 3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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