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새벽 이용 수칙

조회 2댓글 01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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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이 잦은 직업이라 24시간 무인 헬스장을 끊었다. 지문 등록하고 아무 때나 가는 곳. 새벽 두세 시에 가면 보통 나 혼자다.

한 달쯤 다녔을 때 그걸 봤다. 입구 게시판에는 이용 수칙이 코팅되어 붙어 있다. 낮에 보면 여덟 항목이다. 회원권 양도 금지, 기구 정리, 땀 닦기, 그런 것들. 그런데 새벽에 가면 아홉 항목이었다.

아홉 번째 항목은 코팅이 아니라 종이에 손글씨로, 여덟 번째 아래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9. 새벽 1시~5시 이용 회원께서는 아래를 지켜주세요.
- 러닝머신은 끝 번호(12번)를 쓰지 마세요. 예약석입니다.
- 거울에 대고 자세를 오래 확인하지 마세요. 삼 세트면 충분합니다.
- 스트레칭 존에서 인사를 받으면 목례만 하고 자리를 옮기세요.
- 샤워는 물이 데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하세요. 갑자기 차가워지면 그날은 그냥 나오세요.
- 마지막으로 나가는 회원은 소등하지 마세요. 마지막이 아닐 수 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관장이 별나다고 생각했다. 무인 헬스장 관장들은 CCTV로 진상 회원들을 하도 봐서 벽보가 구체적으로 변한다. 예약석이니 목례니 하는 것도 그런 사연이겠거니 했다.

낮에 갔던 날, 아홉 번째 항목이 없길래 관장한테 물어봤다. 마침 순회 온 날이었다. 새벽에 붙는 수칙은 뭐예요, 하니까 관장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되물었다.

"회원님 새벽에 다니세요?"

네, 하니까 관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거 제가 붙인 거 아니에요."

"…그럼 누가요?"

"몰라요. 새벽 시간대에만 붙어 있고, 아침에 제가 출근하면 없어요. 떼는 것도 제가 아니고요. CCTV로 붙이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각도만 이상하게 화질이 뭉개져요. 반년 전부터 그래요." 관장은 남 일처럼 말했다. "근데 내용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냥 둬요. 12번 머신은 실제로 고장이 잦고."

틀린 말이 아니라서 둔다. 무인 시설 운영자의 실용주의였다.

나는 그 뒤로도 새벽에 다녔고, 수칙을 지켰다. 지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12번은 원래 구석이라 안 썼고, 거울 앞에 오래 있는 취미도 없었다. 다만 세 번째 항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인사를 받으면 목례만 하고 자리를 옮기라는 것. 새벽 헬스장에서 나한테 인사할 사람이 없는데.

시월 어느 새벽에 그 항목을 쓰게 됐다.

스트레칭 존에서 폼롤러를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왔다.

"운동 열심히 하시네요."

중년 남자 목소리였다. 낮고, 상냥하고, 숨소리가 안 섞인 목소리. 러닝머신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숨이 차는데, 이건 숨이 하나도 안 들어간 발성이었다. 나는 수칙대로 했다.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까딱, 목례. 그리고 폼롤러를 들고 프리웨이트 존으로 자리를 옮겼다.

옮기면서 거울을 안 볼 수는 없었다. 헬스장은 사방이 거울이니까. 시야 가장자리 거울에 스트레칭 존이 스쳤다.

비어 있었다.

나는 그날 샤워를 하려다가, 물이 데워지다 말고 갑자기 차가워지길래, 수칙 네 번째 항목대로 그냥 나왔다. 나오면서 불을 안 껐다. 다섯 번째 항목대로. 마지막이 아닐 수 있으니까.

다음 날 새벽에 갔더니 게시판의 손글씨 수칙 밑에 한 줄이 늘어 있었다. 같은 필체로, 그런데 이번엔 나한테 하는 말처럼.

- 어제 잘하셨습니다. 계속 그 시간에 오세요. 그 시간엔 회원님이 제일 예의가 바릅니다.

칭찬인지 예약인지 모를 문장이었다. 나는 지금도 새벽에 다닌다. 시간을 옮길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 문장의 마지막 줄이 자꾸 밟혀서 못 옮기고 있다. 제일 예의가 바르다는 말은, 비교 대상이 있다는 말이다. 그 시간에 오는 게 나 말고 또 있고, 걔들은 예의가 없다는 말이다.

예의 바른 회원이 계속 다녀주는 게, 그 시간대의 균형에 뭔가 도움이 되는 모양이라고, 나는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인 시설은 원래 회원들이 지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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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장#규칙괴담#새벽#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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