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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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 12년차다. 아버지 밑에서 배워서 지금은 내가 팀을 꾸린다. 오래된 집 도배를 가면 벽지를 뜯는 일부터 한다. 요즘은 위에 덧바르는 경우도 많지만 제대로 하려면 뜯어야 한다. 뜯다 보면 그 집이 살아온 세월이 겹겹이 나온다. 꽃무늬 아래 줄무늬, 줄무늬 아래 신문지 초배, 그 아래 칠십 년대 시멘트. 애들 키 표시, 낙서, 스티커 자국. 남의 집 벽 속을 들여다보는 게 이 일의 은근한 재미다.

그 집은 재작년 봄이었다. 읍내에서 좀 떨어진 이층 단독주택. 집을 내놓으려고 전체 도배를 새로 한다고 했다. 의뢰인은 오십 대 아들이었고, 그 집엔 노모가 혼자 살다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고 했다.

안방 벽지를 뜯는데 이상한 게 나왔다.

문 옆 벽, 어른 가슴 높이쯤에 볼펜으로 그은 바를 정 자가 있었다. 正 자 여덟 개하고 한 획. 마흔한 개를 센 표시다. 뭘 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낙서야 흔하니까 그냥 넘겼다. 문제는 그다음 겹이었다. 그 벽지를 마저 뜯으니까 아래 겹 벽지가 나왔는데, 정확히 같은 자리에 또 正 자가 있었다. 이번엔 서른여섯 개.

벽지는 모두 다섯 겹이었다. 연식으로 치면 사십 년 치는 될 거다. 다섯 겹 전부, 같은 자리에, 正 자가 있었다.

제일 안쪽, 그러니까 제일 오래된 겹에는 열두 개. 그다음 겹에 스물넷. 그다음이 서른, 서른여섯, 그리고 제일 바깥 겹이 마흔하나.

같이 간 후배가 재밌어했다. 이 집 사람들 대대로 뭘 세는 집안인가 봐요. 나도 처음엔 웃었다. 그런데 자꾸 걸리는 게 있었다. 필체였다. 사십 년 치 다섯 겹의 正 자가 전부 같은 손이었다. 볼펜 누르는 힘, 가로획 삐침, 획 간격. 도배쟁이는 남의 낙서를 많이 본다. 부모가 긋고 자식이 이어 그은 키 표시는 딱 보면 손이 바뀐 게 보인다. 이건 안 바뀌었다.

사십 년 동안 같은 사람이, 도배를 새로 할 때마다, 새 벽지 같은 자리에 다시 세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의뢰인한테 지나가듯 물었다. 안방 벽에 뭐 세어놓은 표시가 있던데 혹시 아시냐고. 의뢰인은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어머니한테 전화로 물어봐 주기까지 했는데, 노모는 한참 잠잠하다가 우리 집엔 그런 거 없다, 라고만 했다고 한다. 그 한참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의 집안일이다. 우리는 도배를 마쳤다. 새하얀 실크벽지로. 正 자 다섯 겹은 전부 뜯겨서 마대에 담겨 나갔다.

거기까지면 그냥 좀 별난 현장이었다.

몇 달 뒤에 그 아들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안방 벽지가 한 군데 들떴다고. 하자보수야 당연히 가야 하니까 갔다. 집은 아직 안 팔린 채 비어 있었다. 안방 문 옆, 그 자리였다. 가슴 높이. 손바닥만 하게 볼록하니 들떠 있었다.

풀 문제거나 습기겠거니 하고 커터로 들뜬 부분을 갈랐다.

벽지 뒷면에 正 자가 하나 있었다.

한 개. 새로 시작한 한 개. 내가 바른 벽지의 뒷면에. 그러니까 방에서 보이는 면이 아니라, 벽에 붙는 쪽 면에.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한참 그걸 봤다. 도배는 내가 했다. 바를 때 뒷면에 아무것도 없었다. 풀칠을 내 손으로 했으니까 안다. 그리고 벽지 뒷면에 뭔가를 쓰려면, 벽과 벽지 사이에서 써야 한다.

나는 그 부분을 잘라내고 새로 때웠다. 의뢰인한테는 습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때문인지 모르니까.

작년에 그 집 앞을 지날 일이 있었다. 팔렸는지 마당에 세발자전거가 있고 빨래가 널려 있었다. 이사 온 집은 보통 몇 년 안에 도배를 새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깨끗하게 해놨으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하게 될 거다. 그때 그 집 안방을 뜯는 게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문 옆 가슴 높이에서 뭐가 나오면, 세지 말고 그냥 뜯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흔하나 다음이 몇인지, 나는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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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기술직#주택#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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