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 영수증

조회 0댓글 02시간전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아버지가 운전을 그만두시면서 차를 물려받았다. 십오 년 된 세단인데 관리가 잘 돼 있었다. 아버지는 차계부를 쓰는 분이었다. 글러브박스에 주유 영수증이 고무줄로 묶여 연도별로 정리돼 있었다.

명의 이전하고 처음 세차하던 날, 그 영수증 뭉치를 버리려고 꺼냈다가 습관처럼 훑어봤다. 아버지의 십오 년이 리터 단위로 남아 있었다. 늘 같은 주유소, 늘 오만 원, 격주 간격. 규칙적인 분이었다.

이상한 영수증은 팔 년 전 뭉치에 있었다.

날짜는 팔 년 전 시월 어느 새벽 두 시 십사 분. 아버지가 새벽 두 시에 주유를 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아홉 시면 주무시는 분이다. 주유소도 처음 보는 상호였다. 고속도로 하행선 휴게소 주유소. 우리 가족은 그쪽으로 갈 일이 없다. 외가도 친가도 반대 방향이다.

금액이 제일 이상했다. 칠만 삼천 원. 가득 주유다. 아버지는 십오 년간 오만 원씩만 넣던 분이다. 가득 넣은 영수증은 그 한 장뿐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붙어 있던 영수증이 하나 더. 같은 휴게소 편의점. 같은 새벽 두 시 이십일 분. 품목: 생수 2, 김밥 2, 두통약 1, 어린이 밴드 1.

어린이 밴드.

팔 년 전이면 나는 대학생이었고, 우리 집에 어린이는 없었다.

엄마한테 물어봤다. 팔 년 전 시월에 아버지가 밤에 어디 다녀온 적 있냐고. 엄마는 달력을 꼽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다고. 아버지는 외박한 적이 없는 분이라고. 그러다 엄마가 뭔가를 기억해냈다.

"아, 그 무렵에 아버지 차 조수석이 한동안 이상했어. 시트가 앞으로 바짝 당겨져 있더라고. 아버지가 정비소에서 만졌나 보다 했지."

조수석 시트를 바짝 당기는 사람. 다리가 짧은 사람.

아버지한테는 못 물어봤다. 아버지는 재작년부터 기억이 흐려지셔서 요양병원에 계신다. 좋은 날에도 팔 년 전 어느 새벽을 기억하실 리 없다.

대신 지난 면회 때, 아버지 상태가 좋은 날이라 옛날 얘기를 이것저것 하다가, 지나가듯 그 휴게소 이름을 말해봤다. 아버지는 창밖을 보다가 나를 봤다. 그리고 흐린 기억 속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는 얼굴로, 또렷하게 한 문장을 말했다.

"약속 지켰다고 전해라."

누구한테요, 하고 물었지만 아버지의 또렷함은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다시 창밖의 새 얘기를 하셨다.

집에 와서 영수증 두 장을 다시 봤다. 이번엔 순서대로, 시간을 재면서. 새벽 두 시 십사 분 주유. 가득. 두 시 이십일 분 편의점. 생수 둘, 김밥 둘, 두통약, 어린이 밴드.

기름을 가득 넣는 건 멀리 갈 때다. 생수와 김밥이 둘인 건 둘이 먹을 때다. 두통약은 아픈 사람이 있을 때고, 어린이 밴드는 다친 아이가 있을 때다. 그리고 조수석 시트가 당겨져 있던 건.

그 새벽 아버지 차에는 다리가 짧고, 어딘가 다치고, 멀리 가야 하는 동승자가 있었다.

나는 그 시월의 지역 뉴스를 검색해봤다. 그 무렵 그 하행선 방면 소도시에서 아이를 찾는 실종 전단이 돌았던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무사히 발견됐다는 단신도. 발견 경위는 "시민의 도움"이라고만 나와 있었다.

같은 건인지 아닌지 나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아버지는 십오 년간 오만 원씩만 넣던 분이고, 딱 하룻밤 가득 넣었고, 그 밤에 대해 평생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흐려진 기억 속에 "약속 지켰다"만 남겨두셨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일도 비밀로 한다. 아마 그 밤 조수석의 아이와 한 약속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겠지.

영수증 뭉치는 못 버렸다. 글러브박스에 도로 넣어뒀다. 이 차의 기록이니까. 오만 원짜리 십오 년 사이에 칠만 삼천 원짜리 하룻밤이 껴 있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차계부니까.

본 콘텐츠는 창작입니다.

#자동차#이무이#영수증#가족
미스터리 목록으로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