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9화. 누나
《없는 주소》 — 연재 9화
가족관계증명서는 아침에 뗐다. 무인발급기에서 천 원.
어머니 항목에 외조부모가 나올 줄 알았는데, 상세증명서를 떼야 한다고 했다. 다시 떼었다. 외조부 란은 사망으로 일찍 정리돼 있었고, 외조모 란에 이름이 있었다.
지창숙.
발급기 앞에서 나는 그 석 자를 오래 봤다. 창숙이네 손주. 노인이 맞았다. 나는 창숙이네 손주였다. 내가 몰랐을 뿐이다. 서류는 알고 있었다. 서류상 외조모 지창숙은 십이 년 전 사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년 뒤였다. 외할머니는 그때까지 살아 계셨다는 얘기다. 우리가 장례를 간 기억이 없는데.
토요일에 병원에 갔다.
누나는 사 인실 창가 자리에 있다. 투석 날이 아니라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다. 내가 사 간 사과를 깎으면서 누나는 물류센터 반장 흉을 듣고 병동 간호사 얘기를 하고, 늘 하던 대화의 궤도를 돌았다. 우리 남매의 대화는 정해진 노선이 있다. 서로의 통장과 서로의 병세만 안 지나가면 어디든 간다.
나는 노선을 벗어났다.
"누나. 엄마 고향이 어디야?"
사과 깎던 손이 멈췄다. 잠깐이었다. 손은 다시 움직였는데, 깎이는 껍질의 폭이 달라져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서류 뗄 일이 있었는데 외할머니 성함이 나오더라고. 지창숙. 나 그 이름 처음 봤어."
"…처음이겠지. 엄마가 말을 안 했으니까."
"누나는 알았어?"
누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에 놓고, 과도를 내려놓고, 손을 물티슈로 닦았다. 시간을 버는 동작들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우리 남매는 서로 기다려주는 것도 잘한다.
"알았어. 나는 몇 번 봤으니까. 아주 어릴 때." 누나가 창밖을 봤다. "외할머니. 무뚝뚝한 분이었는데 나한테 늘 미역국을 끓여줬어. 이상하지. 생일도 아닌데 올 때마다 미역국."
"어디서 봤는데? 외갓집?"
"외갓집은 없었어." 누나의 말이 빨라졌다. "없어. 원래 없었어. 그 얘긴 왜 자꾸—"
"엄마 고향이 적동리야?"
병실의 소음이 한 겹 멀어졌다. 옆 침대 TV 소리, 복도의 카트 소리가 다 있는데 우리 사이만 진공이 됐다. 누나는 나를 봤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었다. 제일 안 좋은 얼굴이었다. 각오한 얼굴.
"…누가 그래."
"누나."
"누가 그러냐고."
"손님이."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반만. "대리 손님 중에 그 동네 출신 어르신이 있었어. 나보고 창숙이네 손주 아니냐고 하더라."
누나는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불 위의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시작했다.
"엄마가 그랬어. 우리는 물가에 안 사는 거라고."
처음 듣는 문장이었다.
"어릴 때 아파트 청약 넣을 때도, 강변 쪽은 쳐다도 안 봤어. 여름에 계곡 놀러 가자고 조르면 엄마 얼굴이 하얘졌어. 나는 그게 그냥 엄마가 물을 무서워하는 건 줄 알았지. 근데 한 번, 내가 중학교 때 물어봤거든. 엄마는 고향이 어디야, 하고. 방학 숙제에 부모님 고향 조사가 있었어."
누나는 사과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먹으라는 게 아니라 손을 비우고 싶은 동작이었다.
"엄마가 그러더라. 없어졌어, 하고. 이사 갔냐고 하니까, 아니, 없어졌어. 동네가 없어졌어. 댐이 생겨서. 그러고는 입을 닫았어. 나는 숙제에 그냥 외가: 없음, 이라고 썼어. 선생님한테 혼났지. 없는 게 어딨냐고." 누나가 웃었는데 웃음이 아니었다. "없는 게 있더라고요, 선생님."
"외할머니는? 그 뒤로도 봤어?"
"엄마 돌아가시고는 한 번. 장례식장에 오셨었어. 너는 기억 안 나지, 너 그때 정신없었으니까. 구석에 앉아 계시다가 발인 전에 가셨어. 가시면서 나한테 딱 한마디 하셨어."
누나는 거기서 멈췄다.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구급차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소윤아, 동생 운전 못 하게 해라."
나는 숨을 천천히 쉬었다. 누나가 나를 봤다.
"그때는 부모님이 사고로 가셨으니까 하시는 말인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받아들였고. 근데 너 대리 시작한다고 했을 때 내가 왜 그렇게 말렸는지 알아? 그 말이 자꾸 생각나서 그랬어."
누나가 말리긴 했었다. 몸 상한다고, 밤일은 하지 말라고. 나는 빚 얘기로 눌렀고, 누나는 자기 병 때문에 생긴 빚이라 더 말을 못 했다. 그 침묵의 안쪽에 이런 게 들어 있는 줄 몰랐다.
"엄마 유품 상자, 네 원룸에 있지." 누나가 말했다. "나 퇴원하면 같이 열어보자. 나 혼자는 무서워서 못 열겠고, 너 혼자 여는 것도 싫어."
알겠다고 했다. 병실을 나오는데 누나가 등 뒤에서 불렀다.
"도윤아."
돌아보니 누나는 사과를 한 쪽 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어서 말했다.
"너 요즘 밤에 자꾸 이상한 데 가지. 손에서 물비린내 나."
나는 내 손을 코에 대봤다.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적어도 나한테는.
— 10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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