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47화. 이름
《없는 주소》 — 연재 47화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게 세 시 십오 분이었다.
면회 시간이 아니었다. 새벽 세 시의 병동에 보호자가 들어갈 방법은 없다. 없어야 정상인데, 그 새벽엔 있었다. 야간 데스크의 간호사가 나를 보더니, 이상하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스테이션 옆문을 열어줬다. 환자분이 아까부터 안 주무시고 동생분 오신다고 해서요, 라고만 했다. 나는 누나한테 온다고 연락한 적이 없었다.
누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협탁에 편의점 미역국 컵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김이 나고 있었다. 새벽 세 시의 병실에서 갓 데운 온도로.
"왔네." 누나가 말했다. "꿈에서 할머니가 그랬어. 손주가 짐 들고 가니까 마중 나가 있으라고."
나는 명부를 협탁에 올렸다. 보자기를 풀었다. 삼베 끈을 풀고 표지를 열었다. 한지에 붓글씨. 세로쓰기. 적동리 세거록(世居錄)이라고 적혀 있었다. 종이는 여전히 말라 있었고, 먹은 어제 쓴 것처럼 검었다.
나는 회관에서 들은 부탁을 누나한테 전했다. 물 밖에서, 소리 내서, 한 번씩. 누나는 다 듣고 나서 링거 폴대를 잡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사상 앞에 앉는 자세였다.
"불러야지." 누나가 말했다. "제사가 별거야. 이름 부르고 밥 먹는 거지. 밥은 있네, 미역국이지만."
우리는 첫 장을 폈다.
첫 이름은 낯선 어른의 이름이었다. 나는 소리 내서 읽었다. 김OO. 병실의 새벽 공기 속에서 그 석 자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누나가 따라 읽었다. 김OO. 두 번 불린 이름 옆에는 그 사람의 생몰과 혼인과 자식들이 붓글씨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름만 불렀다. 사연은 부르는 게 아니라 읽는 거니까, 그건 눈으로 했다.
서른아홉 집. 백구십몇 명. 두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아는 이름들이 나왔다. 주공아파트 노인의 이름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 이름은 부르는 게 이상했는데, 누나가 그냥 부르자고 했다. 산 사람 이름은 부르면 복이 되지 뭐. 밧줄 집의 성씨가 나왔고, 뱃사공 노인의 이름도 나왔다. 우리는 다 불렀다.
우리 집 장이 나왔을 때 누나가 잠깐 멈췄다.
지OO. 외증조모. 그 아래 지창숙. 그 아래로 시집간 기록과 함께 어머니 이름. 어머니 이름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 밖에서 태어난 나와 누나는 이 명부에 없었다.
"우리가 이어 적어야겠네." 누나가 말했다. "나중에. 붓으로."
외증조모의 이름을 부를 차례에 누나는 미역국 컵을 두 손으로 쥐고 불렀다. 지OO 할머니. 할머니만 직함을 붙였다. 규칙 위반인지 모르겠지만 저쪽 장부도 이 정도는 봐줄 거였다.
창숙 할머니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김OO. 엄마.
누나가 엄마, 를 붙였고, 나도 따라 붙였다. 그 이름을 소리 내 부른 게 십사 년 만이라는 걸 부르면서 알았다. 무덤 앞에서도 우리는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엄마라고만 했지. 이름은 부르는 거라는 걸, 물속의 어른한테 배워서야 했다.
명부를 덮은 게 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창밖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누나는 식은 미역국을 마셨다. 나도 마셨다. 참기름을 마지막에 둘렀는지는 알 수 없는 편의점 국이었는데, 그 새벽엔 그게 제일 따뜻한 국이었다. 전할 말을 전했다. 참기름은 마지막에. 누나는 그 말에 웃다가 조금 울었다. 지 에미가 그걸 매번 까먹았대, 하는 대목에서.
"도윤아." 누나가 컵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 이상한 거 하나 말해도 돼?"
"어."
"아까 이름 부르는 동안, 병실 바닥이 한 번도 안 젖어 보였어." 누나는 자기 왼팔을 걷어 보였다. 마른 소매, 마른 팔. "그리고 지금, 되게 오랜만에… 몸이 가벼워. 수치 얘기가 아니라. 얹혀 있던 게 내려간 것처럼."
나는 병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갔다. 아침 여섯 시의 주차장에서 폰을 확인했다.
앱 알림이 하나 와 있었다. 다섯 시 삼십사 분 수신. 명부를 덮은 시각이었다.
「운행이 완료되었습니다.」
— 48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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