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43화.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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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주소》 — 연재 43화

나는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다.

박씨의 규칙이었고, 지키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몸이 자꾸 내리려고 했다. 어른이 마당에 서 계신데 차에 앉아 있는 건 우리 집 교육에 없는 일이라서. 나는 핸들을 잡은 채 그 마음을 눌렀다. 기사는 운전석에 있을 때만 기사다.

마당의 사람이 마루 끝에서 내려섰다. 고무신이 마당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물속의 마당인데 흙 밟는 소리가 났다. 걸음이 느리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노인의 걸음인데 아픈 데가 없는 걸음.

가까워질수록 헤드라이트 가장자리 빛에 모습이 잡혔다. 작은 체구. 쪽 찐 머리가 아니라 짧게 자른 흰머리. 한복이 아니라 몸뻬바지에 스웨터. 삼십 년 전 시골 할머니의 저녁 옷차림. 나는 왜인지 한복 수의 같은 걸 상상하고 있었고, 그 상상이 부끄러워졌다. 이 분은 죽으러 남은 게 아니라 살던 대로 남은 거였다.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가 이분을 닮은 거겠지. 눈매와 입가가 그랬다. 백미러 없이도 알겠는 얼굴. 우리 집 얼굴이었다.

외증조모는 조수석 창 옆에 와서 허리를 조금 굽히고 차 안을 들여다봤다. 나는 창을 내렸다. 이 정도는 규칙 위반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노인의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주공아파트의 그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마와 눈매와 입가를 하나씩. 오래된 사진에서 아는 얼굴을 찾는 시선. 그리고 찾았다.

"…창숙이 손주가 왔네."

주공아파트 노인과 같은 문장이었는데, 온도가 달랐다. 그 노인의 것이 알아봄이었다면 이건 기다림이 닿은 소리였다.

"예. 한도윤입니다. 창숙 할머니 딸, 김OO의 아들이요."

이름들을 불렀다.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니까. 외증조모의 눈이 이름 하나마다 깊어졌다. 딸의 이름에서 제일 깊어졌다.

"OO이가… 니 에미가." 외증조모는 말을 골랐다. 삼십 년 만에 꺼내는 말들은 창고 깊은 데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먼저 갔지."

"예. 십사 년 됐어요."

"안다." 외증조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가 만났어야 하는 앤데, 못 왔어. 길이 안 열려서. 문 앞까지 왔다가 갔어, 그 밤에."

십사 년 전 그 밤. 문 앞까지 왔다가. 나는 목이 뜨거워지는 걸 참았다. 지금은 참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운행 중이니까.

"할머니. 모시러 왔어요."

준비한 문장은 더 길었는데, 나온 건 그게 다였다. 그리고 나는 지갑에서 사진을 꺼냈다. 누나가 넣어준 것. 창을 통해 내밀었다.

외증조모는 사진을 두 손으로 받았다. 마당의 어스름 속에서, 젊은 어머니와 갓난 누나가 이 대문 앞에 서 있는 사진을 오래 봤다. 사진을 든 손이 흔들리지 않는 게 더 슬펐다. 삼십 년 치 흔들림이 이미 다 지나간 손이었다.

"소윤이." 외증조모가 사진 속 갓난쟁이를 짚었다. "그 밤에 배에서 하나도 안 울던 애."

"이제 서른다섯이에요. 지금 병원에 있어요. 콩팥이 안 좋아서요. 근데 곧 나을 거예요." 나는 왜인지 그 말을 보태고 있었다. "나아야 돼요. 그러니까 할머니, 타세요. 가면서 얘기해요. 저 시간이…"

시계를 봤다. 한 시 이십 분. 세 시까지 한 시간 사십 분.

외증조모는 사진에서 눈을 들어 나를 봤다. 그리고 뒷좌석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금을 풀었다. 딸깍 소리가 물속 마당에 울렸다.

문은 저쪽이 열었다. 박씨 말대로였다. 문이 열리고, 외증조모가 차에 올랐다. 서스펜션이 아주 살짝 눌렸다. 무게가 있었다. 나는 그 눌림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무게가 있다는 건 승객이라는 거다. 백미러 속 형체들과는 다른, 진짜 승객.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기사의 문장을 말했다. 삼 년 동안 수천 번 한 말인데 처음 하는 말 같았다. 외증조모는 뒷좌석에서 사진을 무릎에 놓고, 창밖의 자기 집을 봤다.

"잠깐만." 외증조모가 말했다. "마을 한 바퀴만 돌아서 가자. 인사할 데가 있어."

등록에 없는 경유지였다. 도착 전에 어떤 부탁도 들어주지 말 것. 박씨의 리스트가 머릿속에 떴다. 그런데 그 리스트는 태워다 드리는 운행의 리스트였다. 데리러 온 운행의 매뉴얼은 없다. 처음 하는 운행에는 습관이 매뉴얼이랬다.

내 습관은, 어른이 인사하러 가자면 모셔다드리는 거였다.

"예. 천천히 도세요, 어디로 갈까요."

나는 차를 돌렸다. 백미러를 봤다. 한 번, 두 번. 뒷좌석의 외증조모는 창에 손을 대고 마을을 보고 있었다. 두 번 다 같은 모습이었다. 안심되는, 살아 있는 사람 같은, 승객의 모습.

— 44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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