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42화. 물 아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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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주소》 — 연재 42화

산길은 지난번의 그 길이었다. 새것 같은 노면, 중앙선 없는 포장로. 회차 지점을 지날 때 나는 그 자리를 알아봤다. 지난번에 겁먹고 후진했던 자리. 이번엔 지나쳤다. 1.2킬로미터 앞의 목적지를 향해서.

물 냄새가 왔다. 창문을 확인했다. 다 닫혀 있었다. 냄새는 그래도 왔다. 히터 내기순환 속으로, 문틈으로, 아니면 그냥 공기의 성분이 바뀌는 건지도 몰랐다. 박씨 말대로 고이게 두지 않으려고 나는 숨을 규칙적으로 쉬었다. 들숨 셋, 날숨 넷. 물류센터에서 무거운 걸 들 때 하는 호흡이었다.

내리막이 계속됐다. 산속인데 계속 내려간다는 건 지형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트립미터는 이제 보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부터는 이쪽 물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커브를 하나 돌자, 헤드라이트 끝에 물이 나왔다.

호수였다. 밤의 호수가 도로 끝에 벽처럼 서 있었다. 도로는 완만하게 물속으로 내려가며 사라졌다. 옛날 도로가 수몰될 때 그랬을 모습 그대로. 아스팔트가 수면 아래로 잠기는 지점에 물결이 찰랑거렸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섰다. 밟으려고 밟은 게 아니라 발이 먼저 밟았다.

"직진입니다." 유정의 목소리가 말했다.

수면이 헤드라이트를 받아 검게 반짝였다. 직진하면 물이다. 십 미터 앞이 물이다. 나는 핸들을 쥔 채 그 물을 봤다. 그때 알았다. 십사 년 전 아버지가 어디서 끝났는지. 열리지 않은 길이란 이거였구나. 무자격 기사의 헤드라이트에는 이 지점에서 물이 아니라 가드레일이 나왔겠구나. 길이 열리는 사람한테만 물이 문이 되는 거구나.

"직진입니다."

같은 안내가 한 번 더 나왔다. 재촉이 아니었다. 유정의 목소리는 재촉을 모르는 목소리였다. 확인이었다. 길이 맞다는 확인.

나는 액셀에 발을 옮겼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밟았다.

보닛이 수면에 닿는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다. 물이 갈라진 게 아니었다. 물이 비켜난 것도 아니었다. 수면이 유리가 됐다. 차가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데 물이 차를 적시지 않았다. 창밖으로,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 물속 풍경이 열렸다. 위로는 수면이 천장처럼 일렁이며 멀어지고, 앞으로는 삼십 년 잠겨 있던 도로가 마른 채 뻗어 있었다.

물 아래 길은 고요했다. 소리가 다 걸러진 고요. 엔진 소리조차 한 겹 이불을 덮은 것처럼 들렸다. 헤드라이트에 길가의 것들이 지나갔다. 이정표. 녹슬었지만 서 있는. 적동리 2km. 버스 정류장 표지판. 담장. 그리고 나무들 — 잎이 없는데 죽지 않은 것 같은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수초가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 없는 바람에 흔들렸다. 여기는 물속이니까, 그건 바람이 아니라 물결이겠지. 머리로는 아는데 눈은 자꾸 바람이라고 우겼다. 저녁 바람 부는 시골길이라고.

2킬로미터는 금방이었다.

마을이 나왔다.

먼저 보인 건 불빛이었다. 집집의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백열등의 노란 불. 삼십 년 물속에 잠긴 마을의 창문들이, 저녁밥 짓는 시간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낮은 지붕들, 골목, 전봇대, 빨랫줄. 빨랫줄에 흰 천들이 널려 그 바람 아닌 바람에 흔들렸다.

조씨가 왜 그랬는지 알았다. 무섭지가 않은 게 제일 무서웠다던 말. 이건 폐허가 아니었다. 마을이었다. 저녁의 마을. 누가 삼십 년 동안 매일 저녁을 유지해온 마을.

"목적지 부근입니다."

골목 하나를 돌자 그 집이 나왔다.

돌담, 낮은 대문, 마당의 감나무.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대문 기둥의 문패도 헤드라이트에 잡혔다. 흐려서 안 읽히던 사진 속 그 문패가, 이제 또렷했다. 지OO. 외증조모의 함자였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마당에, 마루 끝에, 불 켜진 방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유정의 목소리가 말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내비가 꺼졌다. 이제부터는 안내가 없는 구간이었다.

— 4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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