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19화. 어머니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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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주소》 — 연재 19화

유품 상자를 병원에서 도로 가져온 뒤, 성경책은 내 책상 위에 있었다.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다 말다 했다. 성경책은 손때가 탄 물건이었는데, 이상하게 갈피들이 다 앞쪽에 몰려 있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 신앙의 흔적이라기엔 편중이 심했다. 노인을 만나고 온 날 밤, 나는 그 갈피들을 하나씩 열어봤다.

갈피마다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일기라고 부르기엔 조각들이었다. 달력 뒷장, 전단지 여백, 은행 봉투. 손에 잡히는 종이에 그때그때 적은 글들. 날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다. 어머니는 일기장을 쓰는 대신, 쓴 것을 성경책에 숨기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도 우리도 성경책은 안 여니까. 가장 안전한 금고였던 셈이다.

나는 그것들을 책상에 펴놓고 날짜순으로 맞춰봤다. 검수하듯이. 오래 걸렸다. 몇 장은 물류센터 서류 맞추듯 필체의 볼펜 종류로 순서를 잡았다.

제일 오래된 조각은 삼십 년 전이었다.

"이삿짐 쌌다. 엄마는 말이 없다. 할머니는 여전히 안 나오신다고 한다. 외삼촌이 오늘도 업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왔다."

할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나한테는 외증조모가 되는 사람. 19-4의 세대주 지OO. 붉은 도장. 거부.

"보상 서류에 다들 도장 찍었다. 할머니 것만 안 찍혔다. 면에서 나온 사람이 서류를 두고 갔다. 엄마가 그걸 아궁이에 넣으려다가 말았다."

다음 조각. 필체가 흔들려 있었다.

"물 들어오는 날 밤, 배가 한 척 나갔다 왔다. 아무도 그 얘기를 안 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 노인의 이야기와 같은 밤이었다. 어머니는 그 배에 탔던 사람이다. 갓난쟁이 손녀, 라고 노인이 말한 아기가 누나였는지 어머니였는지 계산해봤다. 삼십 년 전이면 어머니는 이십 대. 갓난쟁이는 누나다. 어머니는 누나를 안고 그 배에 있었다.

"소윤이가 밤에 운다. 나도 울고 싶다. 손목이 아직 아프다. 왼쪽."

왼쪽. 나는 종이를 내려놓고 잠깐 천장을 봤다. 다시 집었다.

날짜가 한참 건너뛴 조각들이 이어졌다. 운평 정착 초기의 생활 메모들. 그 사이에 문장 하나가 불쑥 박혀 있었다.

"엄마가 꿈 얘기를 한다. 할머니가 지붕에서 손을 흔드신다고.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나는 꿈을 안 꾼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인가."

그리고 결혼, 아버지 얘기, 내 출생으로 보이는 시기의 조각.

"도윤이가 태어났다. 시댁 식구들이 아들이라고 좋아한다. 엄마는 아기를 안고 한참 보다가 이상한 말을 했다. 얘는 마른 아이네. 무슨 말이냐니까, 아무것도 아니래."

마른 아이. 노인의 말이 겹쳤다. 물 밖에서 나고 자란 첫 아이. 외할머니는 갓난 나를 안고 그걸 알아본 거다.

마지막 갈피의 조각이 제일 최근 것이었다. 볼펜이 아니라 연필이었고, 필체에 힘이 없었다.

"엄마 제사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차에서 라디오가 혼자 채널을 옮겼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꼭 노 젓는 소리 같았다. 여보한테는 말 안 했다. 밤 운전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사가 늦게 끝났다.

우리 애들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려줄 거다. 주소도, 꿈도, 빚도. 내가 다 가지고 갈 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날짜를 셈해보니 부모님 사고 몇 달 전이었다.

나는 조각들을 순서대로 클리어파일에 끼웠다.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다 끼우고 나서 파일을 덮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가, 싱크대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내가 다 가지고 갈 거다.

어머니는 가지고 가지 못했다. 주소는 밤마다 내 뒷좌석에 타고, 꿈은 누나의 병상에 오고, 빚은, 빚이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뭔가가 남아서 삼십 년째 이자가 붙고 있다.

노트를 펴고 오늘 자 정리를 했다.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어머니는 지우려던 사람이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지우려던 걸 복원하고 있다.

이게 배반인지 상속인지, 나는 아직 판단을 보류한다.

— 20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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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대리운전#심야#도시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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