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주소 — 18화.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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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주소》 — 연재 18화

주공아파트의 그 노인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엔 낮이었고, 맨정신의 방문이었다. 아파트 경로당 앞 평상에서 노인은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는 데 몇 초 걸렸고, 알아보고 나서는 장기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왔구먼, 창숙이네.

모르는 게 낫다면서요, 하고 나는 평상 끝에 앉았다.

"모르는 게 낫지. 근데 올 줄 알았어. 그 집 피가 원래 한번 물면 안 놔."

장기 상대 노인이 자리를 비켜줬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자리를 피해주는 동작이었다. 이 경로당에 적동리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그때 감이 왔다.

나는 준비해 간 질문을 하나만 했다. 마지막 밤 얘기를 해달라고. 물이 빨리 들어왔다는 그 밤.

노인은 장기알을 통에 하나씩 담으면서, 오래된 순서로 이야기를 꺼냈다.

"담수 시작하고 사흘짼가. 위에서 비가 왔어. 여기는 안 오고 상류에만. 그래서 아무도 몰랐어. 물이 반나절 만에 어른 키만큼 올라왔으니까. 낮에 마지막 이삿짐 트럭이 나갔고, 밤엔 마을에 사람이 없어야 했어."

"있었죠."

"있었지." 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들 알았어. 그 집 할매가 안 나온 거. 보상이고 뭐고 안 받고, 도장도 안 찍고. 자식들이 몇 번을 업으러 들어갔는데 그때마다 몸부림을 쳐서 못 업어 나왔어. 마지막엔 자식들도 지쳤지. 물 차기 시작하면 나오시겠지, 설마 죽기야 하겠나, 그랬어. 다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야."

노인의 손이 장기알 위에서 멈췄다.

"그날 밤에 물이 그렇게 올 줄 누가 알았나. 자정 넘어서 아랫동네 사는 뱃일하던 이가 배를 몰고 들어갔어. 마을이 벌써 반은 잠겼는데. 나는 둑에서 봤어. 손전등 하나 들고 배가 들어가는 거."

"그 배에 누가 탔어요?"

"들어갈 땐 뱃사공 혼자. 나올 땐…" 노인은 셈을 하듯 잠깐 눈을 감았다. "다섯. 그 집 식구들이야. 할매 데리러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자식들하고 손주하고. 물이 순식간에 차서 지붕으로 올라갔던 거를, 배가 한 집 한 집 돌면서 건졌어."

"할머니는요."

노인은 눈을 떴다. 장기알을 통에 담았다. 딱, 딱, 소리가 평상에 떨어졌다.

"배가 작았어."

그 한 문장으로 노인은 그 밤을 다 말했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고, 노인은 한참 만에 이었다.

"여섯 자리 배에 뱃사공 하나, 건진 사람 다섯. 할매까지 타면 일곱이야. 그 밤 물살에 일곱은 못 떠. 다 안다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전부. 할매가 제일 먼저 알았고." 노인은 내 눈을 봤다. "할매가 지붕에서 안 내려왔어. 손주 하나가 배에서 손을 뻗었는데, 할매가 그 손을 잡고… 배 쪽으로 당겨줬어. 배가 물살에 밀리니까. 잡아주고, 밀어주고, 그러고는 손을 놨어."

노인은 자기 왼쪽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무의식적인 동작 같았다.

"그 밤에 배에서 끌어올려진 사람들은 다 왼팔을 잡혔어. 뱃사공이 오른손으로 노를 잡고 왼손으로 사람을 건졌으니까, 물에 있는 사람 왼팔을 잡게 돼. 할매도 그랬고. 그 집 피들은 그래서…" 노인은 거기서 말을 골랐다. "왼쪽이 젖어. 취하면. 대대로."

바람이 평상을 지나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도 그 배에 타셨어요?"

노인은 대답 대신 왼쪽 소매를 걷었다. 칠십 넘은 팔뚝, 검버섯 사이로,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나란한 네 줄의 자국이 있었다. 멍도 흉터도 아닌, 피부보다 반 톤 어두운 무늬처럼.

"이건 안 없어져. 육십 년을 살아도." 노인은 소매를 내렸다. "우리는 이걸 잡힌 자국이라고 안 불러. 건져진 자국이라고 불러. 그 팔 덕에 산 거니까. 근데 요즘 애들, 그러니까 자네 같은 손주 대들은 이게 뭔지도 모르고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어. 취해야 나오고."

"저는 없어요. 확인해봤어요."

노인은 나를 물끄러미 봤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오래갔다.

"그렇겠지. 자네는 건져진 집 아이가 아니니까."

"…무슨 뜻이에요?"

"창숙이는 그 배에서 건져진 사람이야. 창숙이 딸도, 갓난쟁이 손녀도. 그 밤에 다 건져졌어." 노인은 장기알 통을 닫았다. "근데 자네는 그 뒤에 태어났잖아. 물 밖에서 나고 자란 첫 아이야, 자네가. 그 집에서."

노인은 평상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었다. 경로당으로 들어가다가, 등을 보인 채 마지막 말을 놓고 갔다.

"건져진 사람들은 잡혔던 팔이 젖고, 건져지지 않은 사람은…"

노인은 끝을 맺지 않고 들어갔다. 나는 평상에 남아 내 왼팔을 봤다. 마른 소매. 매끈한 팔뚝. 표식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나는 빚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직 물에 안 들어가 본 사람이거나.

— 19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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