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줄 왼쪽 버튼

조회 1댓글 05시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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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 골목 초입에 오래된 캔 자판기가 있다. 도색이 다 바래서 원래 무슨 브랜드 기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래도 관리는 되는지 음료는 채워져 있고 불도 들어온다.

이 자판기가 좀 이상하다는 건 이사 오고 한참 지나서 알았다.

네 번째 줄 왼쪽 끝에 이상한 버튼이 하나 있다. 샘플 캔이 완전히 빛바래서 흰 바탕에 흐릿한 주황색 자국만 남았는데, 자세히 보면 이십 년도 전에 단종된 과즙 음료다. 어릴 때 문방구 앞에서 마시던 기억이 나는 물건. 품절 표시등도 안 들어와 있다. 그러니까 기계 입장에서는, 그 음료가 지금 들어 있다는 얘기다.

처음엔 그냥 관리 안 하는 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에 컵라면 사러 나갔다가 자판기 앞에서 담배 피우던 옆 건물 아저씨가, 내가 그 버튼을 들여다보는 걸 보고 한마디 했다.

"그건 누르지 마요."

고장이에요? 하니까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고장은 아닌데."

그러곤 그냥 갔다. 이 동네 사람들 대화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어느 날 눌러봤다. 낮이었다. 오백 원을 넣고 네 번째 줄 왼쪽. 덜컹, 하고 나왔다.

진짜로 그 음료였다. 이십 년 전 디자인 그대로. 캔은 이상하게 미지근했다. 냉장 칸에서 나왔는데 손에 쥐면 체온이랑 비슷했다. 그리고 캔 바닥의 유통기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지워진 게 아니라 아예 인쇄가 없었다.

마실 생각은 안 들었다. 방에 가져와서 책상에 뒀다.

다음 날 아침에 문을 여는데 현관 앞에 그 캔이 놓여 있었다. 내 방 책상에 있어야 할 캔이. 문 손잡이 바로 아래, 똑바로 세워져서. 나는 방을 확인했다. 책상 위엔 없었다. 창문은 잠겨 있었고 도어락 기록도 없었다. 원룸 현관 앞이면 CCTV가 있을 텐데, 관리인은 확인해달라니까 귀찮아하면서 그런 걸로 영상을 돌려보진 않는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기보다, 뜻을 알 것 같아서 이상했다. 돌려놓으라는 거다.

그날 저녁에 캔을 들고 자판기로 갔다. 넣을 데가 반환구밖에 없어서 반환구에 밀어 넣었다. 캔이 안으로 사라지는 느낌이 나긴 했는데,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일주일쯤 뒤에 보니 네 번째 줄 왼쪽 버튼에 품절등이 들어와 있었다. 처음 보는 상태였다. 한 달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꺼졌다. 다시 들어 있다는 뜻이다.

편의점 야간 알바 하는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친구는 별로 안 놀랐다. 자기네 점장이 그 자판기 얘기를 한 적 있다고 했다. 점장 말로는, 그 버튼은 사는 게 아니라 갚는 거라고.

뭘 갚는 건데?

"몰라. 점장도 몰라. 근데 가끔 새벽에 그 버튼 누르고 가는 사람들이 있대. 다들 캔을 안 마시고 들고 간다더라. 두 손으로."

두 손으로, 라는 데서 나는 그만 물었다.

요즘도 그 앞을 매일 지나다닌다. 버튼은 어떤 날은 품절이고 어떤 날은 아니다. 나는 이제 그 등을 보고 오늘 누가 뭘 갚았구나, 안 갚았구나 하고 지나간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게 인사가 됐다.

어제는 품절등이 꺼져 있었고, 자판기 위에 오백 원짜리 동전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누가 두고 간 건지, 누가 쓰라고 둔 건지 몰라서 안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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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골목#자취#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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